따뜻한 남쪽의 날씨에 더해 뜨끈하고 뭉근하게 마음을 녹여주는 따뜻한 사람, 고기용(43)씨를 만나고 겨우내 얼었던 몸과 마음이 사르르 녹아들었다. 따뜻한 마음은 봄을, 넓고 넉넉한 품은 바다를 닮았다.
오전 11시, 출근을 준비하는 마음 가짐
출근 준비가 한창인 목포의 기용씨 가정을 찾았다.
조금은 특별한 한 가장의 근무 시간.
그는 1시부터 4시까지 목포의 한 초등학교에서 기타와 우쿨렐레를 가르친다.
“투병 전에는 저도 9시에 출근했었죠.”
늘 웃음이 끊이지 않던, 화목하고 단란했던 가정.
유수 통신업체에서 설비기사로 일하며, 넉넉하진 않지만 세 식구가 서로 아끼고 의지하는 따뜻했던 날들.
그러나 간단한 수술 후 출혈이 멎지 않아 찾은 큰 병원에서 기용씨는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이식만이 그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러나 직계가족이 없는데다 유전자 변형이 있는 그와 일치하는 골수는 국내, 해외 그 어디에도 없었다. 부작용이 크지만 유일한 혈육인 5학년 딸, 혜진이의 골수가 50%만 일치한다면 수술을 해보자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혜진이는 검사를 받았고, 정확히 50%가 일치했다.
기용씨의 경우, 반일치 이식 생존률은 50%.
서로를 가장 소중히 여기던 세 식구였기에 수술을 결정했고, 초등학교 5학년 딸 혜진이는 주저없이 아빠의 골수 공여자가 되어 주었다.
급성 백혈병 투병,
생과 사의 기로에서 그가 얻은 것과 잃은 것
삶과 죽음, 반반의 확률.
그 경계선에서 그에게 주어진 50%는 ‘새로운 삶’ 이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항암치료와 이식의 부작용으로 인해 그는 당뇨병을 앓게 되었고, 장기 기능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면역력 저하로 감기를 달고사는 그는 외출 시 늘 마스크를 써야 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직장을 그만둔 후, 5년이 넘는 투병생활과 추적 관리 가운데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이런 혜진이네 사정을 아는 주변 사람들의 추천으로 2014년, 혜진이는 월드비전의 등록아동으로 후원을 받기 시작했다.
“백혈병이라는 큰 병에 걸릴거라곤 한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어요. 너무 막막했습니다. 그래도 월드비전 뿐 아니라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제가 잘 회복할 수 있었죠.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출근을 준비하는 이 시간, 매일 같이 감사함을 느낍니다.”
“너무나도 따뜻한 분, 봄을 닮은 분이예요.”
2014년, 혜진이가 월드비전의 등록 아동이 되며 기용씨 가정을 담당하게 된 사회복지사가 말한다.
“가정을 방문할 때 마다, 다른 가정에서 느낄 수 없는 따뜻함을 많이 느꼈어요. 가족이 정말 똘똘 뭉쳐 누구 하나 불평 없이 이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있구나. 서로를 잘 이해하고 아껴주는 그 마음씨에, 그 따뜻함에 늘 왠지모를 가슴 뭉클함이 느껴졌어요.”
혜진이가 등록 아동이 되고 몇 번의 방문이 있었지만, 그 동안은 알지 못했던 사실 하나.
혜진이네 가정은 백혈병이 발병하기 전부터 해외아동후원을 하고 있었고, 형편이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7년이 넘도록 아이를 후원하고 있었다.
“후원을 중지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우리 딸이 늘 동생을 갖고 싶다고 그랬었거든요. 그래서 후원을 신청하기 전에는 꾸준히 후원을 잘 할 수 있을지 고민은 했지만, 우리 딸아이에게 ‘엠마누엘은 우리 혜진이 동생이야.’ 라고 말을 해주고 난 뒤 부터는 정말 이 아이는 우리 아이가 됐어요. 우리 딸한테 동생이라고 말을 해줬는데 부모가 아프다고 동생을 나몰라라 할 순 없잖아요. 물론 힘들었죠. 직장도 그만둬야 했고, 희귀성 백혈병이라 지원폭이 크지만 의료보험이 안되는 부분은 고스란히 저희 몫이었어요. 그래도 저희는 3만원 때문에 병원에서 쫓겨나진 않잖아요. 못 먹진 않잖아요. 아이 얼굴이 떠올랐어요. 가족 모두 같은 생각이었죠. ‘이것만은 포기하지 말자!’”
그리고 얼마 전, 혜진이네 가정은 국내사업에도 후원하는 후원자가 되었다.
“제가 어려울 때 월드비전의 후원금이 큰 힘이 됐듯, 누군가에게 나의 후원금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조금이나마 수입도 생겼구요.”
부창부수, 남편이 노래하니 아내가 따라한다.
“저는 다시 사는 인생이잖아요, 살 수 있는 확률이 50%밖에 되지 않았었으니까요. 아내는 저의 5년 투병 생활 동안 백혈병 진단받았을 때 딱 한번 울었어요. 그리고 나선 늘 확신을 줬어요. 회복할 수 있다고 늘 격려 해주고 믿어줘서 제가 제 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나중에 말하길 뒤에서 저 몰래 많이 울었다고 하긴 하더라고요. 아! 물론 어린 나이에 골수를 이식해 준 우리 딸, 우리 딸 혜진이 덕도 크지요.”
아이를 후원하는 것도, 음악을 배우고 새로운 꿈을 꾸게 되는 것도 늘 뜻을 같이 해주는 아내가 있어 가능했다고 하는 기용씨. 꿈에 대해 그리고 아내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유독 그의 눈이 반짝인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언젠가 병실에서 TV를 보는데 지라니 합창단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냥, 그 이야기가 너무나 감동적이더라구요. 거창하게 합창단을 꾸려서가 아니라, 그저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을 흘려 보내고, 아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요. 제가 고등학교 때 까지 기타 치는 걸 참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저도 기타 연주로 음악을 통해 희망을 주는 그런 일을 하고 싶었어요.”
이후 그는 기타와 우쿨렐레를 전문적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지금은 방과후 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항암치료와 이식 부작용 때문에 간, 신장 등 장기 기능이 약해져 쉽게 지치고, 면역력이 약해 4계절 내내 감기를 달고 사는 그지만 일주일에 2번은 남해 도서 지역의 아이들을 위해 먼 길을 떠난다.
“사실, 섬에 있는 학교는 잘 안가려고 하지요. 차 타고, 배 타고 들어갔다 나오는 것만 해도 교통비나 시간이 많이 드니까요. 아이들도 정말 못해요. 실력으로 따지면 정말 형편 없죠.(웃음) 그런데, 아이들이 너무나도 행복해 합니다. 정말 좋아해요. 그 아이들을 보면 오가는 길이 힘들어도 발길을 끊을 수가 없더라구요.”
그의 따뜻한 마음은 다시 그에게 돌아왔고, 한 바퀴 돌아 다시 아이들을 향한다.
“혜진이를, 우리 가족을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직은 생활이 어렵지만 나중에 건강해지고, 또 형편이 좀 더 나아지면 지금보다 더 많은 아이들을 돕고 싶어요. 어려운 시기에 도와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삶에 더욱 충실하고,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가겠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학교로 향하는 기용씨의 발걸음이 가볍다.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향수를 뿌리는 것과 같다. 뿌릴 때 자기에게도 몇 방울 정도는 묻기 때문이다.’ -탈무드中-
글, 사진 : 디지털마케팅팀 신호정 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