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때문에 고통 받는 곳이라 하면 대부분 아프리카를 떠올린다. 물론 아프리카의 물 문제도 여전히 심각하지만 한국에서 불과 네 시간 남짓이면 닿는 필리핀 역시 물 때문에 괴로운 나라 중 하나이다. 필리핀은 절대적인 강수량이 부족한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 강우량은 풍부하나 계절에 따라 불균형이 심하고 물을 수용할 수 있는 기반 시설이 미비해 깨끗하고 안전한 식수가 턱없이 부족하다. 수질 오염이 심각한 것도 큰 문제다. 월드비전은 이러한 필리핀의 식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지역 특성에 맞는 효율적이고 전문적인 식수•위생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깨끗한 물과 함께 변화의 희망이 샘솟는 필리핀의 로사리오와 마라곤돈을 찾았다.
물 나르는 소년
마닐라에서 3시간 정도 떨어진 바탕가스 주 로사리오 시에 위치한 산이시드로 마을. 땡볕 아래 작고 왜소한 소년이 커다란 물통 두 개를 대나무로 이어 어깨에 진다. 물통의 무게를 못 이기는 듯 아이는 휘청거리며 위태위태하게 걸었다. 제이슨은 이렇게 하루에 네 번, 한번 갈 때마다 20리터짜리 통 2개에 물을 채우고 돌아왔다. 30여 분을 걸어야 나오는 마을의 유일한 식수원인 샘(spring)에서 제이슨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하루 동안 가족들이 필요한 물을 길었다. 샘과 연결된 좁은 호스 하나로 여러 사람이 물을 긷다 보니 통을 줄 세워 두고 한두 시간씩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은 이들의 일상이기도 했다. 무거운 물통을 매일 어깨에 지고 걷는 일상이 반복되며 제이슨의 다리는 휘고 허리 통증도 심했다.모든 것이 ‘물’ 때문이었다. 이런 제이슨에게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들렸다. 월드비전에서 산이시드로 말을에 레벨 3 대형 식수 탱크 와 수도 시설을 설치한 것이다. 이제 집집마다 설치된 수도 꼭지만 틀면 깨끗한 물이 콸콸 나온다. 하루를 꼬박 물 긷는 일로 보내던 마을 아이들은 학교로 돌아갔다. 월드비전은 정화 시설과 수질 관리 시스템도 구축하여 주민과 아이들이 깨끗하고 안전한 물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모두의 물
시티오버슬랏은 10가구가 사는 바탕가스 주 로사리오 시의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에서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곤 마을 중앙에 있는 깊은 우물(Deep well) 하나뿐이었다. 그마저 깨끗하지 않아 바로 마시거나 사용할 수 없었다. 주민들은 우물 옆에 작은 저장소를 만들어 물을 받은 후 불순물이 가라앉을 때까지 두세 시간 정도 기다렸다가 물을 사용했다. 월드비전은 이 마을에 철분 제거 필터(Iron Removal Filter)를 설치 했다. 철분 제거 필터는 우물에 연결해놓으면 물 속에 있는 유해한 철 성분을 제거해 주기 때문에 필터와 연결된 수도를 틀면 깨끗하고 안전한 물을 바로 마실 수 있다.
마을 주민들은 수도에 호스를 연결해 각자 집에서 물을 받을 수 있도록 하되 시간을 정해 운영하는 등 물 기르는 시간을 절약하고 있다. 또 순서를 정해 철분 제거 필터와 우물을 정기적으로 청소하고, 강한 햇빛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함께 우물 위 지붕도 만들었다.
나소 초등학교 역시 철분 제거 필터가 절실한 곳이었다. “아이들이 학교나 집에서 마시는 물은 주로 깊은 우물이나 샘에서 얻는 것이었죠. 그런 물에는 불순물이 많았어요. 특히 우기에는 많이 오염되어서 물을 마시고 열이 나거나 설사를 해서 학교에 오지 못하는 아이들이 꼭 있었어요. 필터가 설치된 뒤로는 그런 일이 거의 없죠.” 나소 초등학교에서 20여 년간 일한 오로라 선생님은 월드비전에 감사하다는 말을 거듭했다.
월드비전은 바탕가스 지역개발사업장 내 시티오버슬랏 마을과 나소 초등학교 등에 모두 12개의 철분 제거 필터를 설치했다. 깨끗하지 않은 물을 마시며 불안해했던 마을 주민과 아이들에게는 놀라운 위안이다.
‘물’이 가져온 변화
마라곤돈 시의 피낙산한 마을에 월드비전은 1999년 레벨 3 대형 식수 시설을 지원했다. 또 이 시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유지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을 교육했다. 이후, 마을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이전에는 우물에서 물을 길러 사용했지만 늘 부족해 빨래를 하거나 목욕을 할 때는 강으로 가야 했어요. 물이 더러워 수인성 질병도 많이 걸렸고요. 또, 당장 집에서 필요한 물을 길어야 하는 아이들은 학교에 자주 결석했죠.” 피낙산한 마을의 식수사업을 월드비전과 함께 진행한 지역사회조직인 ‘쇼어라인’의 레미 씨가 말했다. 월드비전은 식수 시설과 수도를 설치하고 이를 잘 사용할 수 있도록 교육했으며, 지역사회조직은 이 시설들을 스스로 운영하고 관리했다. 마을 주민들은 식수 시설 관리와 질 좋은 식수를 공급받기 위해 소액의 수도세를 내고 있다. 주민 스스로 식수 시설을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과 의식이 정립되며 월드비전 사업은 종결되었다. 이제 지역사회조직과 주민들은 자체적으로 식수 시설을 유지, 관리하고 있다. 주민들의 수도세를 모아 새로운 식수 시설을 증축하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해 대학 진학을 돕는 등 파낙산한 마을 주민들은 물로 시작된 변화를 새롭게 이어나가고 있다.
3월 22일, UN은 이 날을 세계 물의 날로 정했다. 이 날만큼은 물 부족과 수인성 질병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생각하며 물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일깨우자는 의미이다. ‘물’ 때문에 아프고 힘든 사람들이 ‘물’ 때문에 행복해 지는 그 날까지 월드비전의 노력 역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바탕가스는 변화하고 있습니다”
1999년 마라곤돈에서 월드비전이 진행한 식수사업은 정말 성공적이었습니다. 식수시설이 완공된 뒤, 주민들이 집에서 언제든지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어 마을의 위생 상태가 개선되었고, 아이들은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고, 가정의 소득이 늘어나는 등 식수 시설이 마을에 가져온 변화는 실로 크고 다양합니다. 월드비전이 떠나고 주민들이 스스로 식수 시설을 관리하고 있는 지금, 마라곤돈 주민들은 책임감을 가지고 마을의 식수원을 유지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습니다. 마라곤돈의 사업 성과가 입증하듯이 바탕가스의 식수/위생 사업 또한 성공할 것을 확신합니다. 이 놀랍고 힘찬 변화는 모두 한국 후원자님들의 관심과 나눔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글 : 한성하 커뮤니케이션팀
사진 : 윤지영 커뮤니케이션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