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포 가정개발센터의 12년
후원받다가 이제 후원합니다
감포를 사랑한 부부
감포 FDC를 12년간 이끌어온 데는 전연수 사무장(43세)의 공이 컸다. 그녀는 12년간 무급으로 일했고, 남편은 12년간 자신의 병원 건물 2층을 무료로 임대해주었다.
“사실 처음에 내려올 때는 그냥 공기 좋은 곳에서 몇 년만 지내려고 했어요. 근데 이곳 아이들이 자꾸 눈에 밟히는 거예요.”
그렇게 의사/간호사 부부는 이곳에서 12년을 눌러앉았다. 월드비전 후원자인 이들은 월드비전에 감포 FDC 사업 제안을 했고, 아내는 무급 사무장으로, 남편은 무료 건물 임대 이사로 12년을 일했다.
“수도권에 신도시가 생길 때마다 병원에 자리가 났으니 올라오라는 거예요. 하지만 감포를 떠날 수 없었어요.”
이유는 바로 한 할머니 때문이란다. 울혈성 심부전증으로 3분이면 충분한 거리를 30분 동안 숨을 몰아쉬며 걸어오고, 그냥 오시라고 해도 꼭 치료비로 몇십 원이라도 가져오는 할머니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제가 떠나면 돌아가실 것 같았어요. 죽어가는 생명을 외면하면 제 자신을 의사라 말할 수 없죠.”
지난 세월이 생각났는지 남편의 말에 아내는 눈물을 훔쳤다.
이들 역시 복지법인 ‘해송’의 사무장으로, 후원이사로 계속 지역을 섬긴다. 선한 부부의 말은 12년의 세월을 몸으로 바쳐왔기에 더욱 가치가 있었다.
“감포에 내려온 거 전혀 후회 안 해요. 여기에 와서 더 의미 있고 값진 삶을 살고 있어요. 오히려 더 얻고 있어요.”
등록가정 지원 서비스
“월드비전을 통해 받은 도움을 우리만 누릴 수 있나요. 그동안 받았던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돌려줘야지요.”
은미네는 등록가정이다. 감포 FDC가 생기고 2년 후인 2000년, 초등학교 3학년이던 첫째 은미와 1학년이던 둘째 은찬이 모두 등록 아동이 되었다. 아버지가 중장비 운전을 하다가 추락해 다쳤을 때다.
IMF가 한창일 때 아버지는 실직하고 후유증을 치료하느라 병원에 계셨다. 가세가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졌다.
가족은 생활비 지원을 받았고, 은미와 은찬이는 학습비 지원과 공부방 교육을 받았다. 여름에는 청소년 캠프에 참가하고 대전엑스포에도 다녀왔다.
“지리산에 갔던 게 가장 기억에 남아요. 노고단까지 올라갔던 것도 좋았고, 래프팅은 정말 예상치 못했던 선물이었어요.”
은미가 환하게 웃었다. 은미 아버지는 “받은 만큼은 다 못돌려줘도, 어느 정도는 되돌려주며 살고 싶다”며 후원을 결심했다.
지금도 만성췌장염으로 계속 병원에 다니며 20만 원 정도 치료비를 내지만 아버지는 2만 원씩 꼬박꼬박 월드비전에 후원을 하고 있다.
아버지의 영향일까. 은미도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면 꼭 후원자가 되겠다”고 한다. 은찬이도 후원자에게 편지를 쓸 때 “저도 이렇게 받았으니 커서 후원자가 되겠습니다”라고 썼다고 한다.
감포에 전해진 사랑이 감포에서 다시 피어나고 있다.
월드비전은 2009년 12월 31일에 감포를 떠났다.
대신 그 자리에 감포 지역 주민들이 들어왔다.
지난 12년간의 산업 노하우와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해송’이라는 복지법인을 설립했다. 지역기업(월성원자력발전소)도 재정적으로 한몫 거들었다. 수협 조합장, 의사, 목사, 전 청년회장 등이 모여 이사회를 만들었다.
감포 FDC에서 일했던 직원 한 명은 다른 복지관으로 발령을 받았고, 다른 한 명은 감포 옆 양북에서 지역아동센터를 개설한다. 사무장 이하 다른 직원들은 모두 감포에 남아 ‘해송’이라는 이름으로 감포 지역 주민들을 계속 섬긴다.
결연 아동 169명 중 99명이 자립했고, 70명은 해송의 도움을 받아 지속적으로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하원 이사장(92세)은 “여태껏 월드비전의 지원으로 지역이 풍성해졌는데, 이제는 우리 스스로 고향을 위해 일한다는 게 감동 그 자체”라고 했다.
해송(海松)의 뜻은 바다 소나무다.
이름 때문일까.
거친 바닷바람에도 꿋꿋하게 버티는 소나무처럼 지역 주민을 위한 사랑을 변함없이 펼치리라 기대한다.
글. 최민석 월드비전 대외협력팀
사진. 유별남 사진작가, 감포 FDC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