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시간 탄현의 한 주공 아파트 주차장이 텅 비어있다. 재개발 선정 이후 대부분의 집이 비워진 상태, 하지만 갈 곳이 없어 발을 구르는 집이 있다. 바로 한민수(가명, 57세)씨 가족이다.
한민수 씨와 이미영(가명, 54세)씨 부부는 보증 문제로 3년 전, 지금의 재개발 아파트에 월세로 들어왔다. 빚보증으로 하루아침에 집이 사라졌지만, 천성이 긍정적인 부부는 늦둥이 외아들을 위해 마음을 다잡고 일을 시작했다.
부산스러운 아이, ADHD 판정
아버지는 부동산 중개로 빚을 갚고, 어머니는 하루 6시간, 시간당 4천 원을 받고 주차장에서 주차료 정산 일을 한다. 그나마 공휴일에는 일이 없어 월급 50만 원을 받는데 매달 꼬박꼬박 월세 37만 원을 지불해야 한다.
“하루는 유치원에서 전화가 왔어요. 홍주(가명, 10세)가 너무 부산스러우니 병원에 가보라더군요.”
아이는 한자리에 오래 앉아있지 못하고 책을 자주 찢었다. 의사는 심각한 ADHD(주의력 결핍증)라고 하며 1년간 치료를 권유했다. 마침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이 코앞이었다.
홍주는 부부가 입양한 아름다운 영혼
“어려서부터 부산스럽다고 여겼지 병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우리 부부가 처음에 저 아이를 어떤 마음으로 맞이했는데요, 지금도 미안하고 기가 막혀 눈물만 나옵니다.”
홍주를 입양하던 당시 살림이 유복해 이런 고통을 아이에게 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당장 놀이치료와 자극치료가 시급했다. 어머니는 평소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 하지만, 아이와 관련되면 눈빛이 달라진다.
아이의 상태를 알고 유치원에서 받아주지 않자 적극적으로 교육청과 전문의의 도움을 받아 1년간 적은 돈으로 훌륭한 교육과 치료를 병행했다. 1년 후 홍주는 9살에 초등학교를 입학했고 1학년 과정을 의젓하게 따라갔다.
아버지의 위암3기 판정
부부가 홍주의 치료에 집중하던 2009년 8월, 돈이 아까워 속이 아파도 소화제만 챙겨 먹던 남편이 혈변을 쏟았다. 위암3기 선고를 받고 두 부부는 마음이 막막해져 숨죽여 흐느꼈다.
이번에도 딱한 사정을 주위에서 알고 십시일반 도움을 주어 무사히 수술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건강보험 처리가 안 되는 항암 수입 약값이 20일 마다 50만 원씩 나갔다.
이미영씨는 어려운 형편에 아르바이트를 2시간 더 늘릴까 고민했지만 결국 마음을 접었다. 집에 누워 투병하는 남편과 아이에게 소박하지만 따뜻한 밥과 약을 챙겨주기 위해서다.
당장 집을 비워야 하는데
한민수씨는 아파트 재개발이 결정되어 5월 말까지 집을 비우라는 통고를 받았다. 처음에는 나라에서 주는 임대아파트에 희망을 가졌다가, 영세민이라도 신용불량자는 청약통장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에 그 꿈을 접어야 했다.
얼마 전부터 아이의 치료에 보태기 위해, 그동안 거절했던 입양수급비 15만 원을 받고 있다.
“홍주가 우릴 잡아줬어요. 저 아이가 없었다면 아마 좌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되었는지 검사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아버지, 그는 다시 가족을 부양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우선은 보증금 300만 원에서 1천만 원 월세로 옮겨야 하는 상황이다. 보증금이 조금 더 싼 다른 지역으로 옮길 수 있지만, 어머니는 홍주가 전학으로 정서불안을 느낄까 봐 무척 우려하고 있다.
홍주는 지난겨울 형편상 치료를 중단했다가 한때 불안증세가 악화된 적이 있다. 다시 치료를 시작했지만 경제 사정이 여의치 않아 아이가 좋아하는 자극치료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고 있다.
홍주가 마음 편하게 치료와 학교생활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집 문제가 빨리 해결되었으면 하는 것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간절한 바람이다.
[야후! 나누리] 엄진옥 기자 umjo2002@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