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비전 해외봉사단원 이야기 1
악명 높은 몽골의 겨울. 그 겨울이 또 한 번 왔습니다.
적어도 내년 3월까지 계속될 몽골의 긴 겨울은 벌써부터 그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낮 기온 영하10도 내외, 아침저녁으로 영하 25까지 떨어지는 기온에 내린 눈은 거리 위에서 얼어붙었습니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게르(몽골 유목민들의 전통적인 주거양식)촌에서 태우는 갈탄연기는 이미 숨쉬기 힘들 정도로 울란바타르 시내를 덮고 있습니다.
하지만 몽골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본격적인 겨울은 시작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머지않아 영하 50도까지 기온이 떨어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드(dzud, 재해)라 불리는 몽골의 혹독한 겨울
‘저드’는 몽골말로 ‘재해’라는 뜻인데, 보통 혹독한 겨울날씨로 인해 발생하는 재해상황을 가리킵니다.
저드로 인해 수많은 가축들이 동사하거나 먹을 풀이 없어서 굶어 죽습니다. 저드는 ‘하얀 저드’와 ‘검은 저드’, 두 가지 종류로 나눕니다.
검은 저드는 가뭄과 한파로 인해 초원에 풀이 제대로 자라지 않아 겨울 동안 가축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상황을 말합니다.
하얀 저드는 폭설이 목초지를 몽땅 덮어버리는 바람에 가축들이 눈 아래 묻혀버린 풀을 뜯어먹을 수 없어 굶어 죽는 상황을 말합니다.
작년 겨울에는 약 8백 4천 만 마리(2010년 5월 30일 통계)의 가축들이 겨울을 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대부분의 가정이 유목생활을 통해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유목민들에게 가축을 잃는다는 것은 생계를 잃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혹독한 겨울날씨를 ‘재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월드비전 몽골의 ‘저드 구호활동’
올해 4월, 월드비전 몽골에서 봉사단원으로서의 일을 시작했고, 시작한지 3주 만에 지방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작년 겨울 동안 월드비전 몽골이 진행했던 ‘저드 구호활동’의 사후 모니터링을 위한 출장이었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장면들이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월드비전 몽골의 구호활동은 저드로 인한 피해가 가장 큰 13개 아이막(행정구역상 우리나라의 도에 해당)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서 우르항가이와 바양헝거르 아이막을 방문하였습니다.
각 아이막에서 4개의 솜(우리나라의 군에 해당)이 지원대상으로 선정되었고, 각 솜마다 적게는 45 가구, 많게는 75 가구가 수혜가정으로 선택되었습니다. 각 아이막 정부의 보건국에 작업반이 설치되어 월드비전 몽골과 구호활동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논의하였고, 작업반은 각 솜마다 기동팀을 설치하여 해당 솜의 수혜가정에 대한 실제적인 지원을 제공하였습니다.
각 기동팀은 보통 5명(팀의 리더인 솜 보건소 의사, 사회복지사, 운전사, 자원봉사자 2명 )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수혜가정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 내용은 가축들의 사체를 위생적이고 안전하게 처리하는 방법 교육 및 소독약품 지원, 아동의 영양섭취에 대한 교육 및 스프링클(Sprinkles, 아동을 위한 가루형태의 필수미량영양소) 제공, 저드 피해로 입은 정신적 충격에 대한 심리상담 및 건강검진 등 이었습니다.
총 26 가구를 방문하여 월드비전의 지원을 제대로 제공 받았는지, 생계를 회복하는 데에 있어서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집 가축들은 안녕합니까?
유목민들이라 게르 하나를 찾아가는 것부터가 쉬운 길이 아닙니다. 봄이 왔지만 아직까지도 초록과는 거리가 먼, 여전히 겨울의 황량한 색을 띤 벌판과 나무라고는 한 그루도 찾아볼 수 없는 민둥산이 만나는 지점 즈음에 하얀색 점 하나가 저 멀리 보입니다.
비포장길를 한참 달려 그 점에 가까이 다가가니, 게르 한 채가 덩그러니 서 있습니다. 축사에는 겨울을 견뎌낸 소 몇 마리가 대견하게 살아 남아있습니다. 300마리 이상이었던 소가 이제는 겨우 18마리 남았다고 합니다. 가축들의 사체는 이미 처리한 듯 보이지 않습니다.
이 게르는 젊은 부부가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는 가정입니다. 임신 7개월인 부인은 만삭에 가까운 달수에도 불구하고 유심히 보지 않으면 임신한 것 조차 알아채지 못할 만큼 야위었습니다.
다른 가정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입니다. 가축들의 겨울나기를 위해 은행대출까지 받아 사료를 샀지만, 결국은 절반 이상의 가축들이 죽었고 생계수단을 잃어버린 할아버지는 은행대출 이자를 갚는 일이 막막하다고 한숨을 쉬십니다.
일곱 명의 아이들과 부모가 함께 살고 있는 한 가정은 겨울 내내 큰 게르는 가축들에게 내어주고 일곱 식구는 그 옆의 작은 게르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사람보다 가축이 먼저입니다.
언젠가 몽골 직원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몽골에서는 보통 서로 안부를 물을 때, “하시는 일은 잘되십니까, 가족은 안녕하십니까?” 하고 묻는데, 시골의 유목민들은 제일 처음 묻는 안부가 “그 집 가축들은 안녕합니까?”라는 이야기.
노부부가 사는 게르를 찾았습니다. 웃통을 벗고 계신 할아버지의 몸이 앙상합니다. 고혈압과 호흡곤란을 겪고 계신 할아버지는 지난 겨울 내내 가축들을 돌보느라, 결국에는 죽어버린 가축들을 처리하느라 일을 많이 해서 탈진한 상태였습니다.
다른 가정에 비해 훨씬 많은 수의 가축을 잃었다는 노부부. 우리에게 맑은 차를 건네던 할머니가 이제 가축이 없어서 우유를 얻을 수 없다고, 그래서 수태차(몽골 사람들의 식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차로, 차에 우유와 소금을 넣고 끓여서 마십니다)를 더 이상 마실 수 없게 되었다고 힘겹게 말씀하십니다.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이내 밖으로 나가버리십니다.
또 한 번의 겨울이 옵니다
부모들의 얼굴에는 겨울의 그림자가 아직도 어둡게 남아있었습니다. 겨우 사탕 몇 개 건내는 부끄러운 나의 손으로부터 마치 세상을 다 얻은 듯 빛나게 웃어주는 아이들의 얼굴 덕분에 부모들의 검은 얼굴에도 잠시 웃음이 생겼다 사라졌습니다.
사탕 몇 개 집어주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무기력한 내가 이들에게 있어서 ‘수태차’가 가지는 의미, ‘가축’이 가지는 의미를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을 어떻게 공감해야 이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강아지 한 마리 키우다 잃어본다 한들 그들이 느낄 상실감의 크기를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요.
작년 겨울의 흔적이 겨우 아물자 또 다른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몽골 기상청에 따르면, 이번 겨울도 작년 못지않게 혹독한 저드가 찾아올 것이라고 합니다. 눈은 작년보다 더 많은 양이 내릴 것이라고 합니다. 기상 재해를 막을 수 없다면 철저하게 대비를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월드비전 몽골을 비롯한 몽골국가재난관리청, 유엔 기구들, NGO들은 벌써부터 힘을 합쳐 저드 대비에 나섰습니다. 다양한 차원의 공동노력을 통해 올해는 작년보다 그 피해의 규모가 줄어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올 겨울은 유목민들에게 잔인한 계절로 기억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글/사진. 월드비전 몽골 긴급구호팀
KOICA지원 월드비전 해외봉사단원 김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