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비전과 시설
그 희망의 협력관계
월드비전은 60여년 전, 한국 전쟁의 폐허 속에서 태어났다. 한국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지막 민간 항공기를 타고, 모두가 떠나는 한국으로 들어온 밥 피어스 목사는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고아와 미망인들의 처참한 모습에 마음이 깨어졌다. 그리고 한경직 목사와 함께 월드비전을 만들고 전쟁의 폐허 속에 방치된 이들을 돕기 시작한다.
그들은 나눔의 손길을 모아 전쟁고아와 미망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구호시설을 세우고 지원에 힘썼다. 또한 사회적으로 소외받았던 한센병 환자와 그 자녀들, 장애아동, 혼혈아동을 도울 수 있는 시설도 마련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월드비전이 진행한 사랑과 나눔은 이들을 위한 일시적인 구호를 넘어 보다 장기적인 도움을 주고자 시설 중심의 사업과 결연을 통한 모금이라는 형태로 발전되고 안정되어 갔다.
그리고 60여년이 지난 현재, 월드비전은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전환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의 약자들을 돌보고 있는 시설지원협력사업은 이어지고 있다.
월드비전, 고아와 미망인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다
1951년, 전쟁 중이었던 한국은 전체 국민 중 38%가 긴급구호를 받아야 하는 구호대상자였다. 1953년부터 1959년까지 한국의 1인당 국민 총생산이 65달러밖에 되지 않던 당시에는, 사회복지의 제도적 입법이 전혀 이루어져 있지 않은 상황이었고,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전쟁고아의 수는 20만 명에 이르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5만여 명만이 고아원 시설에 수용되는 형편이었다.
“나는 그날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고아들의 가련한 모습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나는 무엇에 붙잡힌 사람처럼 두려움에 싸여 있었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소리쳤습니다.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남을 위해 계속 마음 쓰지 못한 것을 용서하시고, 기도하기를 잊었던 일을 용서해주십시오. 이제 제 마음을 깨뜨리소서. 당신의 마음을 깨뜨린 것들로 제 마음을 깨뜨리소서.’ “
-밥 피어스 목사의 기도-
밥 피어스목사는 한국의 전쟁고아와 미망인들을 돕기 위해 미국 내 교회들을 찾아 다녔다. 그리고 후원금을 모아서 우선 급한 고아원이나 모자원에 쓰도록 한국에 있는 미국 침례교나 장로교, 동양선교회(OMS) 같은 기관에 전달했다. 동시에 시설들에 대한 직접 지원도 시작했는데, 그렇게 쓰인 첫 해의 사업비가 4만 4,767달러였다.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지원을 위한 아동결연
보육원 등의 시설과 그 시설에 사는 어린이들을 체계적이고 안정적으로 돕기 위해 1953년부터 아동결연이 시작됐다. 미국 후원자들은 매월 10달러씩 최소한 1년 동안 한국 고아 돕기를 권유 받았다.
1950년대에는 미국이 중심이었다면, 1960년대에는 캐나다와 호주, 그리고 1970년대에는 뉴질랜드 후원자로 확대되었다. 이 결연 방법은 구호사업에 있어서 새로운 차원을 연,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후원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고아들에게 가족으로서의 소속감을 조금이나마 채워주려는 시도이기도 했는데, 모두는 아니었지만, 개인적인 편지와 사진 교환, 선물 등을 통해서 후원자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으며, 강한 유대감을 가지게 된 결연아동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아동결연은 1973년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빈곤가정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판단아래 빈곤 가정 아동들을 돕는 사업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1979년부터는 열악한 환경의 마을을 아이들이 살기 좋은 마을로 바꿀 수 있도록 지원하는 지역개발사업을 하면서 그 마을의 아이들과 결연을 맺는 형태로 발전되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절대적 빈곤인구가 전 국민의 40%를 넘을 정도였고 (서상목 외, 빈곤의 실태와 영세민 대책. 서울: 한국개발원, 1981 :p33) 1인당 국민 총생산이 평균 105달러였던 1960년대 한국에서, 해외로부터의 도움은 우리나라 사회복지에 큰 역할을 했다. 심지어 1961년부터 1966년까지는 외국 원조액이 보건사회부 예산보다 많았다.
당시 월드비전은 가장 많은 원조를 한 기관 가운데 하나였으며, 월드비전에서 지원된 원조액은 보건사회부 예산의 7%가 넘었다. 이렇게 1950-1960년대 월드비전 후원금 중 상당부분은 한국의 시설아동들의 의식주 해결과 의료, 교육을 위해 사용되었다.
결연아동 다이앤 혜자 프라이스
한국전쟁의 포화 속, 남동생과 함께 거리를 전전하던 맨발의 어린 소녀, 김혜자. 음식도 옷도 없었다. 남동생의 끼니까지 책임져야 했던 그녀는 길에서 구걸을 했다. 그러다가 당시 월드비전 담당자에게 발견되어 월드비전이 지원하던 혜광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잠잘 곳이 생겼고, 밥도 먹을 수 있었어요. 월드비전이 내 삶을 구해준 것이지요.” 열세 살에 미국으로 입양된 그녀는 50년간 한국 땅을 밟지 않다가 2011년 딸이자 배우인 린제이 프라이스와 함께 그녀의 지난 삶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돌아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제 삶은 생존의 이야기지요. 저를 입양하고 후원해주신 분들의 결과물이 바로 저입니다. 그들이 제 가족이 되었고, 삶이 되었지요. 이제 제가 누군가를 돕는 사람들에게 힘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생명을 살린 월드비전 아동병원
국가 전체적으로 아동을 위한 의료체계가 전혀 갖춰지지 않았던 1950~1960년대 거리를 떠돌거나, 시설에 있던 아동들이 제 때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가난과 방치 속에서 먹지 못하고, 보호받지 못한 아이들은 쉽게 사망하곤 했다.
1953년 10월 월드비전은 고아와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의 무료진료를 위해 보조금 5만 달러를 들여 대구 동산병원 내에 아동병원을 설립하고, 매달 1,300달러씩 지원하면서 간호사를 파견하는 등 다양한 지원을 했다.
대구 시내와 근교뿐 아니라 부산지역의 시설 어린이들까지 이 병원에서 무료진료를 받았는데, 월드비전에서 파견되어 어린이를 돌보던 코완 간호사는 “만약 동산 아동병원에 입원하지 못했다면 죽었을지도 모를 아이가 많았다”고 보고할 정도였다. 당시 동산 아동병원의 하워드 모펫원장도 “그 때 한국에서는 아이들의 치명적인 질병을 고칠 수 있는 곳이 동산 아동병원 밖에는 없었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1960년대의 가난한 부모들은 아기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자 차라리 부자가 배불리 먹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거리에 자신의 아기를 버리기도 했었다. 당시 버려진 아기들을 돌보는 영아원의 숫자는 서울에만 10곳. 그 중 5곳이 월드비전(당시 선명회) 지원시설이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워 버림받거나 위탁된 고아들이 급증하면서 의료사업 대상자도 급속하게 증가했고, 이에 월드비전은 1961년 대전 선명회 아동진료소, 1964년 김포 선명회 아동병원을 개원했다. 1962년부터 성로원의 아기들을 돌보기 시작한 김종찬 원장은 1994년 2월, 월드비전 소식지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처음에는 80명의 아이들을 맡아 키우게 됐어요. 정부예산이 15%, 선명회의 지원이 80%였으니 그 당시 선명회의 역할이 무척 큰 것이었지요. 폐렴이나 홍역이 돌기 시작하면 손 쓸 여유도 없이 아기들이 죽어나가던 그 시절, 관을 짜서 화장해 묻어 줄 수도 없어서, 삽을 들고 죽은 아기를 직접 내 손으로 묻으면서 울기도 참 많이 울었습니다.
선명회(현 월드비전) 아동병원이 생기자 아이들의 치료가 참 수월해졌습니다. 너무 고마운 일이었지요. 중환자실에 들어갔던 소생 불가능의 아기들이 살아날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 절박한 순간 희망을 준 월드비전 피어스 장학금
1960년대 시설아동들이 성장하면서 교육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에는 아직 중학생 의무 교육제도조차 실시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교육비는 각 시설에 큰 부담이었다. 특히 열악한 환경에서 눈물 나는 노력으로 대학에 입학한 시설아동들은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입학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시설 아동들을 위해 월드비전은 1963년부터 대학생에게, 1965년부터는 고등학생에게 피어스 장학금을 주기 시작했다. 1979년까지 장학금 수혜자는 중고등학생 2,924명, 대학생 1,119명에 지급된 총액은 1억 3500만원이 넘었는데, 이 장학금 설립을 계기로 많은 시설 아동들이 공부만 열심히 하면 대학교육까지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열심히 공부했다.
선명회(현 월드비전) 피어스 장학금 수여식
월드비전에서 사용했던 선명회(宣明會)라는 명칭은 1950년 미국과 한국에서 한국의 가난 한 어린이를 돕기 위해 월드비전(World Vision)이 설립되면서 월드비전(World Vision)이라는 영문을 한문의 뜻으로 맞춰 쓴 한국어 명칭입니다.
인생의 고비마다 나를 붙들어 준 월드비전
_ 인천 송도고등학교 오성삼교장
건국대 교육공학 교수 재직 시절 고교 교장으로 부임해서 ‘고교로 간 대학교수’로 잘 알려진 교육학자, 2012년, 9월 대학 정년퇴임 후 다시 한 번 학생들의 꿈을 자극하고 가꿔주는 학교 만들기에 도전하는 ‘교육 현장 혁신 실천가’ 인천 송도고등학교 오성삼 교장. 그는 월드비전을 통해 이름도 모르는 많은 후원자의 도움으로 삶의 고비고비를 헤쳐왔다. 초등학교 3학년, 부친이 돌아가신 후 어머니, 어린 동생들과 함께 안훙보육원에서 생활을 한 오성삼 교장은 이곳에서 20여 년 후 상봉하게 되는 외국인 후원자와 결연을 맺고 도움을 받았다.
모든 사람이 보리밥, 새우젓만 먹는 줄 알았던 가난 속에서도, 오성삼 교장은 월드비전 피어스 장학금을 받아 대학과 대학원에 진학했으며 대학졸업을 앞두고 영양부족으로 인한 늑막염이 발견되었을 때는 월드비전 아동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또 미국 유학 중 갑자기 주정부의 장학금이 끊겼을 때도 국제월드비전에서 마지막 등록금을 지원받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적 지원보다 더 소중한 것은 바로 결연을 통해 맺은 후원자 구스타프슨 부부와의 인연이다. 보육원 시절부터 자신을 후원했던 구스타프슨 부부를 미국 중북부의 조그만 기차역에서 상봉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감동적인 순간이었다고.
1995년 유학에서 돌아와 교수 생활을 시작한 그는 월드비전에 7000달러를 보내면서 후원을 받았던 아동에서 후원자로 바뀌었다. 그리고 1999년부터 결연을 시작해서 현재까지 13명의 해외어린이들을 후원하고 있다.
60년의 역사를 되돌아 보며
지금도 70 여 개 시설들을 지원하고 있는 월드비전과 모자원, 보육원 등 시설들과의 협력 및 지원 관계를 60년간 이어오고 있다. 복지체계가 미흡하던 1960년대, 시설이 받던 지원의 대부분이 월드비전 지원이었던 시절을 지나 1970년대 국가의 사회 복지 체계가 확립되고 각 시설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자리를 잡으면서, 그리고 월드비전이 지역개발사업으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월드비전과 사회 복지시설과의 관계는 지원을 주고 받기보다는 함께 아동의 복지를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협력의 관계로 발전했다.
2012년 4월 ,이제 몇 분 남지 않은 2세대 시설장들이 정년퇴임을 앞두고, 우리가 가장 어렵던 시절 사랑을 나누었던 해외 월드비전 후원자에게 감사를 전하고자 국제월드비전 사무실이 있던 미국 캘리포니아 패서디나 사무실을 찾았다. 그 날의 감동을 영락모자원(구 다비다 모자원) 유순도 원장은 이렇게 전한다.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전쟁 직후 외국 원조단체의 도움과 구호물자로 연명했던 역경의 일생을 보낸 1세대 시설장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 오늘날 이토록 발전한 한국의 모습이 겹치면서 격정의 눈물이 나올 수 밖에 없었지요. 외국 후원자님과 월드비전에 대한 고마움도 새롭게 새겨볼 수 있었습니다.”
1950년에 태어난 까닭에 자신을 6.25둥이라고 소개하는 밥 피어스 목사의 딸, 마릴린 피어스 던커씨를 만나 보은의 인사를 하고, 과거의 이야기도 생생하게 듣은 시설장들은, 후임원장들에게 이 이야기들을 잘 전해서 월드비전과 각 시설의 협력관계를 더욱 발전시키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다.
60년의 역사, 그 시작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깨뜨리는 것으로 내 마음도 깨어지게 하소서”라는 단 한 사람의 기도가 있었다. 그 기도는 60년 동안 이어져 생명을 살리고, 절망속에 있던 어린이들을 희망으로 이끄는 수많은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 냈다.
월드비전 ‘시설지원협력사업‘ 이란?
월드비전은 한국전쟁 이후 시작한 보육원, 모자원, 장애아동시설, 직업보도소, 아동병원 등의 시설을 확충 및 지원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이 사업 가운데 일부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글. 홍보팀 김보경
사진. 월드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