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할머니 마가렛 인진주

충북 음성군 소이면의 한 시골마을, 한적한 바람소리가 울리는 인적 드문 곳에 개가 많은 허름한 집이 나온다. 그 집의 주인은 바로 푸른 눈의 할머니. 바로 스위스인 마가렛 닝겟토(67) 여사, 한국명 인진주 씨다. 그의 일과는 아침마다 10마리의 유기견을 돌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 쪽 다리를 저는 아롱이, 눈이 보이지 않는 해피 등 유기견들은 대부분 몸이 성치 않다. “저는 늘 어렸을 때부터 약하고 버림받은 것을 선택했어요. 어렸을 때 아버지가 토끼 새끼들을 가져와 언니, 동생들에게 나눠줬을 때도 저는 가장 약한 것에 마음이 갔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인 씨의 삶은 한국사랑, 특히 한국의 아픔을 보듬어온 인생이었다.

충북 음성군 소이면의 한 시골마을, 한적한 바람소리가 울리는 인적 드문 곳에 개가 많은 허름한 집이 나온다. 그 집의 주인은 바로 푸른 눈의 할머니. 바로 스위스인 마가렛 닝겟토(67) 여사, 한국명 인진주 씨다. 그의 일과는 아침마다 10마리의 유기견을 돌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 쪽 다리를 저는 아롱이, 눈이 보이지 않는 해피 등 유기견들은 대부분 몸이 성치 않다.

한국의 따뜻함에 이끌려 한국 정착

인씨가 한국을 처음 찾았던 때는 1972년, 스위스 베른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중 한국인 동료를 알게 됐고 그들과 친하게 지내던 그는 75년 휴가 때 처음 한국에 왔다. 가난하지만 따뜻한 한국에 자꾸 마음이 갔다. “그때 봤던 것은, 누가 대문 앞에서 나왔으면 쌀 좀 주세요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어려운 가운데서도 사람들은 서로 돕더라고요. 정말 감동이었어요. 그것 때문에 한국에서 살고 싶었어요.” 한국 여행을 다녀 온지 10년 후 인 씨는 간호사가 되어 한국을 다시 찾았다. 그렇게 그는 광주와 군산, 용인 등 전국 각지의 고아원과 양로원, 종교시설 등에서 간호사로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봉사하며 젊은 시절을 바쳤다. 한국의 고아들도 자식처럼 키웠다. 아프고 소외된 한국 사람들을 한국인 보다 더 열심히 찾았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보느라 자신을 돌아볼 새 없었다. 결국 2001년 관절염으로 거의 걷지 못하게 되자 요양 차 음성군에 자리를 트게 됐다. 여전히 약 없이는 살지는 못하지만 그의 나눔 행보는 그치지 않는다. 인 씨를 만난 날도 그는 중간에 진통제를 먹고 있었다.

"마음을 털어놓을 가족이나 풍족하지는 않아도 저는 누구보다 부자입니다."

“마음을 털어놓을 가족이나 풍족하지는 않아도 저는 누구보다 부자입니다.”

수입의 대부분 저개발국 아이들 위해 사용

인진주 씨는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생활비를 쪼개 월드비전을 통해 몽골과 베트남, 방글라데시 등지의 28명의 어려운 어린이들을 1993년부터 남몰래 돕고 있다. 인 씨의 수입은 고국에서 연금으로 들어오는 80만원 남짓의 돈이 전부. 월드비전 해외아동 결연이 3만원인 걸 고려해볼 때 대부분의 수입을 아이들을 위해 사용하는 셈이다. 맛있는 음식을 사 먹을 수도, 변변한 옷을 사 입기도 쉽지 않지만 그는 그런 삶이 행복하다고 했다. 냉장고 안은 김치 반찬통 한 개와 오이 2개 정도가 거의 전부였다.

그의 냉장고 벽면에는 작은 메모가 붙어있다. 전 세계 후원아동들의 이름과 생일이다. 그는 잊지 않고 후원아동에게 편지와 선물을 보낸다. 그런 인진주 씨의 사랑에 아이들은 인 씨를 ‘엄마’라고 부른다. 전 세계 후원 아이들의 이름과 생활 형편을 꿰뚫고 있는 그는 사진 찍는 일이 취미가 됐다. 후원아이들에게 자신의 모습과 삶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직접 만든 카드에는 자신의 집 전경, 소이면의 풍경, 함께 사는 강아지 등 소박한 삶의 모습이 가득 담겨있었다. ‘사랑한다, 축복한다, 너는 소중한 사람이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후원아동 격려해주러 간 몽골 방문..
막상 고국에는 3번 밖에 가지 못해

몽골 후원아동이 특히 많은 인 씨에게 한국에 이어 몽골 역시 각별한 나라다. 몽골 후원아동들이 써 준 편지를 읽기 위해 몽골어도 독학으로 익혔다. 이제 몽골어 편지의 반 이상은 이해하는 수준이 됐다. 책상 위에는 몽골어학 책자도 있었다. 2004년에는 몽골에 직접 후원아동들을 만나 격려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그 때의 추억은 인진주 씨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의 하나다. 그 이후로 아이들에 대한 사랑도 더 각별해졌다. “이 아이는 건강이 좋지 않아요. 그래서 볼이 빨갛지요. 어서 건강해져야 할텐데…제가 매일 기도하고 있어요.”

그런 그지만 막상 고향 스위스에는 지난 20여년의 세월동안 3번 밖에 가지 못했다. 97년 어머니 장례식이 마지막이었다. 지난 해 남동생이 먼저 세상을 떴지만 보러가지 못했다. 너무 소식을 늦게 전해 듣기도 했지만, 비행기 삯도 감당할 수 없었던 탓이다. “아이들 돌보는 것도 좋고, 저 유기견들 돌보는 것도 좋은데, (인진주) 선생님 자신을 돌보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그런데 그런 삶에 익숙하지 않은 분이니까…..” 인진주 씨의 오랜 한국 친구이자 딸 같은 임경희 씨의 말이다.

몽골 후원아동이 특히 많은 인 씨에게 한국에 이어 몽골 역시 각별한 나라다. 몽골 후원아동들이 써 준 편지를 읽기 위해 몽골어도 독학으로 익혔다. 이제 몽골어 편지의 반 이상은 이해하는 수준이 됐다. 책상 위에는 몽골어학 책자도 있었다. 2004년에는 몽골에 직접 후원아동들을 만나 격려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그 때의 추억은 인진주 씨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의 하나다. 그 이후로 아이들에 대한 사랑도 더 각별해졌다. “이 아이는 건강이 좋지 않아요. 그래서 볼이 빨갛지요. 어서 건강해져야 할텐데...제가 매일 기도하고 있어요.”   그런 그지만 막상 고향 스위스에는 지난 20여년의 세월동안 3번 밖에 가지 못했다. 97년 어머니 장례식이 마지막이었다. 지난 해 남동생이 먼저 세상을 떴지만 보러가지 못했다. 너무 소식을 늦게 전해 듣기도 했지만, 비행기 삯도 감당할 수 없었던 탓이다. “아이들 돌보는 것도 좋고, 저 유기견들 돌보는 것도 좋은데, (인진주) 선생님 자신을 돌보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그런데 그런 삶에 익숙하지 않은 분이니까.....” 인진주 씨의 오랜 한국 친구이자 딸 같은 임경희 씨의 말이다.

마지막 꿈은 후원아동 만나러 가는 것

한국의 아이들과 소외된 이웃을 돌봤고 또 한국에 버려진 강아지들까지 보듬는 푸른 눈의 한국 나이팅게일 인진주 씨. 그의 남은 소망은 더 이상 거동이 힘들어지기 전에 많은 후원아동이 살고 있는 지역에 가서 아이를 만나고 오는 것이다. 또 여생을 끝까지 힘들고 상처받은 생명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그에게는 가장 큰 바람이다.

“제게 들어온 건 다 저를 위한 게 아니에요. 저보다 더 아프고 힘든 이들에게 가는 게 당연한 거지요. 그런 삶을 살기에 전 행복합니다.”라고 말하는 푸른 눈의 한국의 나이팅게일. 그는 마가렛, 즉 진주 라는 이름 그대로 빛이 났다. 아니, 보석보다 더.

글.  홍보팀 김효정
사진.  홍보팀 윤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