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대지진 이후 5년, 아이티
“지진 위에 더해진 2차 피해 때문에 참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바로 앞 차가 권총 강도를 당하기도 하고, 여진에 놀라 사무실에서 뛰쳐나오기도 하고, 선거 기간에는 7일 동안 집 밖으로 단 1초도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콜레라가 한창이던 2010년 11월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수도 포르토프랭스 외곽의 보건소 앞에 비닐로 싸여져 있던 많은 아동 시체들, 그리고 옆에서 서럽게 통곡하던 가족과 주민들 모습에 너무 마음이 아파 며칠 동안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사람들은 아이티가 처한 상황을 재앙이라고 부르겠지요?” 1년 6개월 간 아이티에 파견되어 재건복구 사업을 진행했던 강도욱 국제구호팀장이 말했다.
세계 최빈국 아이티를 덮친 21세기 최악의 재난
아이티 대지진은 도시재난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모든 도시는 반드시 슬럼을 끼고 있다. 낙후된 건물들도 많고 인구밀도가 높다. 재난의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 재난의 2차 피해가 얼마나 무서운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 또한 아이티였다. 지진 이후 1년도 되지 않아 찾아온 콜레라와 태풍. 그 위에 더해진 사회적 혼란. 혼돈의 무게도 그 만큼 더해졌다. 지진으로 대통령궁을 비롯한 정부건물이 상당수 무너졌고 관료 사망자 또한 많았다. 전 국민의 1/3이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국가시스템을 통제할 힘이 사라진 것이다.
재건복구가 진행되기도 전에 지진이후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귀향하면서 2차 피해는 더욱 증가했다. 돌아간 곳은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전 세계 곳곳에서 도움의 손길을 주고자 했지만 공항과 도로가 붕괴되어 물자 이동이 쉽지 않았다. 아이티가 재난의 그림자를 벗어버릴 수 있을까?의문을 떨쳐내기 어려운 상황뿐이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났다. 어려워보였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월드비전은 더디지만 꾸준히 진행되는 변화를 함께 만들어가고 있었다.
지진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던 5년
아델리네 씨 가족은 작년 12월부터 월드비전의 지원으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았다. 아이들은 다시 학교에 다니고 아델리네 씨는 매일 출근을 한다. 불과 몇 개월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이다. 지진 발생 다음날 그녀의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그녀 역시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심장이 좋지 않았지만 가족들을 위해 일을 해야만 했다. 아델리네의 가족들이 살게 된 난민캠프는 ‘소돔 캠프’라 불리던 곳.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그곳은 정말 참담했다. 찌는 듯한 열기와 섭씨 45도의 더위를 피할 나무 한 그루, 손바닥만 한 그늘 조차 찾아볼 수 없는 곳. 4년간, 아델리네의 여동생이 한 달에 2번 쌀과 콩을 지원해주었지만 그 이상의 수입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없었다. 음식과 학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2013년의 어느 날. 땅주인이 땅을 돌려달라며 화장실 칸막이를 부수고 주민들에게 떠날 것을 요구했다. “1년 동안 비닐봉지에 볼 일을 봤어요.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배려하진 않았죠.” 땅주인은 주민들을 점점 더 압박해왔고 작년 말이 되었을 때 아델리네의 절망은 절정에 달했다. 그녀도 아이들도 몸무게도 많이 줄어 있었다. “우리 가족들은 꼭 막대기 같았어요. 저는 신께 이 곳에서 우리를 구해달라고, 희망을 좀 보여 달라고 기도했죠. 뭐라도 좀 해달라고요.”
이제 다시 일상으로
그 즈음 그녀는 난민캠프에 나타난 새로운 얼굴들을 발견했다. 아이티월드비전이 시장의 승인을 받아 캠프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전시키고 땅을 다시 소유주에게 돌려주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월드비전은 정부의 승인을 받아 각 가정에 보조금을 지급해 적절한 집을 구하고 1년간 임대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소규모 사업체를 설립해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아델리네는 그들의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했다. “월드비전 직원들의 말을 들었을 때 희망이 샘솟았어요. 우리 아이들과 함께 이 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요. 그런 희망을 가진 게 얼마 만이었는지 몰라요.”
그 후로 일 년이 조금 더 지난 지금 그녀는 아주 많이 웃는다. 지난날을 회상할 때 두 눈에 눈물이 고이기도 했지만 그녀는 행복하다. 아델리네는 이제 땅콩버터를 만들어 파는 작은 가게를 운영한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음식을 살만큼 넉넉한 수입이 생겼다. 다시 올 것 같지 않은 날들이었다. 최근에는 여동생의 도움으로 아델리네는 심장 치료도 받았고 덕분에 건강도 많이 좋아졌다.
알려진 대로라면, 약 55,000명의 사람들이 여전히 난민캠프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난민캠프는 폐쇄되었고 캠프가 있던 자리들은 공공장소로 바뀌었다. 아델리네 가족처럼 많은 사람들이 마을로 돌아와 삶을 꾸리고 있다. 거리에서는 과일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하지만 5년에 걸친 전례 없는 규모의 엄청난 투자와 지원은 아이티를 지진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았을 뿐이다. 여전히 아이티는 인구의 77%가 최저생계비 이하로 살아가는 서반구의 가장 가난한 나라로 남아있다. 아이티 인구의 대부분은 아직도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의 사업이 계속되는 이유다. 아이티에서 재난 이전보다 더 낳은 삶의 회복을 위한 월드비전의 재건복구사업은 오늘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