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양 쓰나미 10주년
긴급구호에서 자립까지
이 거대한 비극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평범한 날이었다. 태국 남부 팡아주 마을 아낙네들은 고무농장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10년 전, 크리스마스 하루 지난 2004년 12월 26일. 고무농장 에서 진액을 채취하는 무리 속에 왕디 씨도 있었다. 누군가 말했다.“왕디, 바닷물이 갑자기 빠져서 물고기들이 땅이 널려있어. 우리도 물고기 주우러 갈까?”
참혹했던 12.26일의 기억
바다가 보낸 첫 번째 신호였다. 왕디 씨가 바다의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있을 때, 어부들도 심상치 않은 바다의 변화를 감지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파도가 마을을 덮쳤다. 누구도 겪어본 적 없는 거대한 지진 해일. 10분 안에 몰려온 세 번의 파도는 이미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 있었다.
왕디 씨는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집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바다를 피해 최대한 육지 안으로 돌아 정신없이 달렸다. 그 시간, 집에서 TV를 보고 있던 왕디 씨의 딸 열세 살 마리사도 갑작스런 재난소식을 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채 아빠를 따라 대피 차량에 올랐다. 주민들을 싫은 차는 산을 향해 내달렸다. 마리자가 고개를 돌리니 검은 파도가 무섭게 뒤 따라 오고 있었다.
마을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다. 반나이라이 마을 130가구 중 3~4가구를 제외한 모든 가옥이 무너져버렸다. 피해는 인도양 연안 국가에서 동시에 발생하고 있었다. 스리랑카, 인도, 인도네시아 등 14개국에서 22만 여 명이 숨졌고 피해규모는 107억 달러 이상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재앙 중 하나였던 인도양 쓰나미. 이전에 본 적 없는 거대한 비극이었다.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상실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매일 타던 작은 어선, 그물망, 집과 사랑하는 사람들. 삶의 전부라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린 그 날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 날에 대해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힘들어해요.” 카티야 보무앙 씨가 말했다.
대피소에 겨우 모인 왕디 씨 가족 역시 겨우 목숨을 구했지만 모든 것을 잃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13살 마리자와 왕디 씨의 마음 깊숙이 이미 위협적인 공포가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혼란과 절망이 혼재된 마을에 수많은 단체들이 모여들었다. 물품보급이 시작되면서 생필품은 어느정도 확보되었다. 하지만 쓰나미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바틱(Batik)공예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다시 평범한 일상이 가능했을까?
일하며 치유하며
쓰나미 직후 태국 정부는 여성들의 생계지원 활동을 고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월드비전은 정부와 협력하여 바틱 공예를 시작했다. 왕디 씨를 포함한 10명의 부녀자들이 대피소에서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염색 공예를 접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바틱 공예는 삶을 일으키고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바틱 공예는 태국 전통 염색 기술로 월드비전 바틱 센터에서는 셔츠와 블라우스, 치마, 숄, 스카프, 벽 장식 등 제품의 60-70%를 수작업으로 생산한다.
“지난 일을 생각하지 않고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았어요. 그리고 같은 아픔과 기억을 가진 사람들끼리 자주 모여 대화를 하면서 서로 위로받고 마음의 상처도 서서히 치유되기 시작했어요.” 그 시절을 회상하는 왕디 씨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바틱 공예를 배우면서 참여하는 부녀자들의 마음에도 색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새롭게 도전하는 일을 즐기게 되었다. 그리고 태국 공주의 방문은 바틱 센터 여성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바틱 센터를 꼼꼼히 둘러본 공주는 “월드비전이 이 지역에서 얼마나 성공적인 사업을 진행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다른 NGO기관들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공주가 운영하는 숍에 바틱 센터의 제품들이 진열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더 단단해졌어요.
참여하는 주민들의 자부심도 함께 커졌다. “마을 주민들 뿐 아니라 외부인들도 우리 작품을 아주 좋아해요. 우리가 쓰는 색감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어요. 오직 이곳에서만 볼 수 있거든요.” 하리암씨가 말했다.
“수익이 두 배로 늘었어요. 쓰나미 전에는 고무농장에서 일하면서 한 달에 5,000바트 정도 벌었는데 요즘은 10,000바트 정도 벌고 있어요. 내 힘으로 돈을 벌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건강하게 키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바틱 센터는 더 큰 성장을 위해 다양한 기회를 찾고 있다. 지난 11월에는 쓰나미 피해지역의 다른 수혜자들과 함께 월드비전이 주관하고 태국 왕자가 후원하는 마케팅 워크숍에도 참여했다. 바틱 디자이너들은 이 자리에서 제품을 더 효과적으로 마케팅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태자비 궁에서는 이미 20,000바트 가량의 제품을 주문한 상태이다. 최근에는 판매를 늘릴 수 있도록 푸켓 시내 대형 상점과 거래를 추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틱 제품 덕분에 온 마을이 유명인사가 되었다. 태국 주요 일간지와 TV프로그램에도 이미 여러 차례 보도가 되었다. 또 반나이라이 마을의 학교 뿐 아니라 이웃 마을 학교에서도 학생들의 신청을 받아 바틱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자립을 향해 끝까지.
바틱 공예는 마을 전체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었다. 바틱을 통해 주민들은 쓰나미의 고통을 딛고 자립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다친 영혼을 치유하고 마을 전체를 고운 색으로 물들였다.
우리가 바틱 센터를 떠나기 전 왕디 씨가 말했다. “쓰나미가 닥친 직후 수많은 단체들이 와서 우리를 도왔어요. 하지만 언젠가부터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어요. 마지막까지 우리 곁에 남아 함께 해준 월드비전에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우리의 사업은 언제나 주민들의 “자립”을 향한다. 재난의 현장에서도 일시적 지원(service-delivery)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 곁에 끝까지 남아 자립을 돕는 것. 우리가 원하는 그들의 자립을 우리는 태국 쓰나미 현장의 바틱 공예 센터에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