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뚫는 남자, 이창훈 아나운서 – 귀를 기울이면

서른한 살 혼자남, "점심에 뭐 먹지?" 제일 고민 되요.

LG트윈스의 오랜 팬인데 올해 성적이 좋지 않아 속상하다. 9위라니. 비 내리는 목요일. 국수가 당기는 데 어디가 맛있을까? 자취하는 혼자남의 끼니는 맛집 검색 앱이 책임진다. 프리랜서라 정해진 출근시간은 없다. 퇴근 후엔 스마트 폰으로 SNS를 확인하고 포스팅을 올린다. 야구 뉴스를 찾아보고 TV를 보다 잠이 든다. 대한민국 30대 남성의 아주 평범한 일상이 그에게도 반복된다. 한 가지 특별한 것. 그는 보는 세상보다 듣고 느끼는 세상이 익숙한 사람이다.

“평소에 너무 정장스타일로 입으니까 나이 들어 보인다고 해서 오늘은 편하게 입고 왔어요.”

“우선 제 소개를 할까요? 저는 2011년 KBS 1호 시각장애인 아나운서로 방송을 시작한 이창훈이라고 합니다. 악수 먼저 해요 우리.” 커피 맛이 좋아 종종 찾는다는 카페에서 이창훈 월드비전 홍보대사와의 즐거운 만남이 시작되었다.

Q. SNS 활동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사진이나 영상도 많이 올리시구요.

아~제가 좀 열심히 하죠?(웃음) 나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에요. 개인적으로 제가 어떻게 지내고 무슨생각을 하는 지 기록해두고 싶기도 하구요. 또 남들은 어떻게 사는 지도 궁금하잖아요. 가끔 몇 년 전 올린 포스팅을 보면서 ‘아 그땐 이렇게 열심히 살았네. 이런 생각도 했구나.’하면서 제 모습을 돌아보기도 하구요. (핸드폰 알람) 어, 인스타그램 알람이 왔네요. (웃음)

“영상이나 사진이 시각장애인에겐 어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편견을 깨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슈퍼맨이거나, 불쌍하거나. 둘 다 아니에요.

Q. 방송이나 인터뷰 제안도 많이 받으시죠?

다큐멘터리나 인터뷰 요청이 많은데, 요즘은 일부러 자제하고 있어요. 미디어에서 장애인을 다루는 방식은 둘 중 하나거든요. 슈퍼맨이거나 불쌍한 사람이거나. 미디어에서 취재 요청을 하면 여전히 대단한 성공으로 부풀리거나 장애인으로 불쌍한 모습으로 다루려고 하는 게 싫었어요. 저는 갑자기 뿅 하고 대단한 성공을 이룬 것도 아니고, 불쌍하지도 않으니까요. 사람들은 저의 ‘장애’에 주목하곤 하는데 그건 제가 극복해야 할 부분이기도 해요. 그래서 뉴스를 볼 때도 저의 장애에 집중하지 않고 ‘내용’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발음이나 전달부분에 더 신경 쓰고 연습해요.

“KBS 1 <사랑의 가족>에서 이창훈의 마주보기 란 코너를 진행하고 있어요.”

Q. 이전에 아나운서로 교육이나 훈련을 받은 경험이 없어서 초반에 많이 고생하셨을 것 같아요.

신입 아나운서 연수 받을 때 정말 많이 혼났어요. 대본 숙지가 안 되어 있다. 발음이 나쁘다. 좋지 않은 버릇이 있다. 실망이다. 그런데 정말 무서웠던 건 방송을 시작한 후로 아무도 말을 해주지 않는다는 거예요. 제가 묻지 않으면 부족한 부분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더 긴장하고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죠.

Q. 특별한 연습 방법 같은 게 있었나요?

주로 익숙하지 않은 뉴스 중심으로 연습을 많이 했어요. 어려운 단어들이나 낯선 뉴스들 위주로요. 예를 들면 당시 이탈리아 총리가 베를루스 코니 였는데, 그런 발음들을 계속 연습하는 거죠. 베를루스코니 베를루스코니 베를루스 코니… (웃음)발성이나 발음을 고치려고 정말 열심히 노력했어요.

“저는 점자 정보 단말기를 이용해 원고를 읽고 뉴스를 전해요.”

제가 가장 많이 전한 뉴스가 뭔 지 아세요?

Q. 뉴스 진행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들이나 실수담 궁금해요.

제가 뉴스 진행하면서 가장 많이 전했던 뉴스가 뭔 줄 아세요? 싸이의 강남 스타일 뉴스였어요. (웃음). 그때가 2012년 이었거든요. 매일 강남스타일 유튜브 조횟 수, 서울시청 앞 싸이 공연 등 소식 참 많이 전했죠.

방송을 하면서 저는 몇 가지 편견을 깼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TV에 시각장애인들이 나오면 보통 안경을 씌워요. 저한테도 뉴스 진행할 때 안경을 쓰자고 제안 하더라구요.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자연스럽지도 않고 안경을 쓰면 오히려 시청자들이 뉴스를 듣지 않고 제 모습에 집중할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말했죠. 시선처리에 더 신경 쓰고 어색하지 않게 노력하겠다고. 또 하나는 장애인이라고 해서 장애관련 뉴스만 전하지 않았다는 거요. 일반 생활뉴스를 전했던 것도 하나의 편견을 깨는 일이라 기분 좋았어요. 사람들은 시각장애인이 라디오에 적합할거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시각장애인이 영상매체에서 활동한다는 것 자체가 편견을 깨는 독특한 시도이기도 하구요.

“방송을 통해 다양한 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건 무척 의미있고 특별하죠.”

르완다에서 제 안의 편견을 발견했어요.

Q. 지난 9월에 르완다 다녀오신 얘기 좀 해주세요.

아! 그 얘기 정말 하고 싶었어요. 가기 전에 주사를 무려 4대나 맞았어요. 키갈리 공항에 내리자마자 아프리카 특유의 향기가 먼저 느껴져서 ‘아 내가 정말 아프리카에 왔구나’ 생각했죠. 동행한 일행들이 거리가 무척 깨끗하다고 놀라더라구요. 아프리카 하면 저도 밀림이나 분쟁, 질병, 가난, 더러운 환경 같은 것들만 떠올렸었는데 제가 틀린 거죠.

“르완다의 사람들을 만나보니 생각이나 의식수준이 무척 높았어요. 그들에겐 단지 좀 더 나은 환경이 필요한 거죠.”

제 후원아동을 만난 것도 잊을 수 없어요. 솔직히 그동안 나눔에 대한 부담이 있었던 것 같아요. 르완다에서 제 후원아동을 만나면서 나눔이 정말 가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나눔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게 되었죠. 아쉽게도 시간이 너무 부족했어요. 더 많이 느끼고 담아오고 싶었는데. 그래도 충분히 특별했어요. 제가 가진 물질과 마음을 전혀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와 나누는 경험도, 그런 아이를 만나 울컥해 보이도 처음이었어요. 한번에 4방이나 주사를 맞은 것도, 끼니마다 감자를 먹은 것도, 귀국한지 1주일이 되도록 밤잠을 설친 것도 모두 처음이었거든요.

아!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흥이 참 많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어디에서든 젬베 하나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몸을 흔들고 흥을 감추지 않는데 격이 없는 아프리카 특유의 그 흥이 참 마음에 들었어요. 르완다는, 제 안의 편견들을 마주하고 깨는 기회가 된 것 같아요. 저도 편견에 많이 부딪히는 사람인데 제 안에도 또 다른 편견이 있었다는 걸 발견하게 된 거죠.

솔로 아니라 홀로 이제 연애할래요.

Q. 올해 계획했던 것 중에 지키지 못해서 아쉬운 건 뭐예요?

올해 연애하기가 목표였는데, 이제 올해가 한 달 밖에 안 남았네요. (웃음) 내년엔 좀 더 적극적으로 노력해야겠어요. 막내누나가 곧 결혼하면 부모님의 관심도 저한테 옮겨 올 차례거든요.

Q. 아직은 ‘시각장애인 1호 아나운서’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은데 앞으로는 어떻게 기억되고 싶어요?

사람들이 나의 ‘장애’에 집중하기 보다는 ‘옆집 청년 같은 앵커’로 유쾌하고 친숙한 사람으로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저도 사람들 만나서 맛있는 거 먹으면 기분 좋고 일이 없을 땐 슬프기도 하고 미래를 고민하고 똑같은 것들을 즐기고 생각하는 대한민국 평범한 30대 솔로 청년이니까요. 아직 깨야할 편견의 벽이 많아요. 제가 더 노력해야죠.

상품이 아닌, 작품이 되고 싶어요.

요즘은 다양한 경험을 하고 여러 사람 만나는 기회를 최대한 누리려고 해요. 아나운서에 도전할 때도 도전 자체에 의미를 뒀거든요.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기회를 누려보고 싶었어요. 지금도 그래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하면서 자꾸 넓어지고 싶어요. 그리고 미디어에서든 어디를 통해서든 소비는 상품이 아니라 그냥 저라는 존재 자체로 ‘작품’이 되는 인생을 살고 싶어요.

샘 오취리, 왜 학교를 짓고 싶냐구요? 르완다, Never forget, never ag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