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월드비전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알바니아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인 리브라즈에 월드비전 사무소를 세워 사업장을 운영 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 월드비전 직원들을 통해 현지 교사 역량강화와 학비지원, 의식강화 프로그램 등의 교육사업과 보건사업, 소득증대 사업, 지역주민 역량강화 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4,000여명의 후원아동들을 중심으로 4만여명의 리브라즈드 현지 주민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알바니아로 가는 길

알바니아로 가기 위해 경유한 이스탄불 공항에서 잠시 만난 터키인 아저씨는 내가 알바니아에 간다고 하니 유럽의 최빈국, 유럽의 소말리아에 간다며 피식 웃는다.

14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끝에 알바니아에 가까워지자 비행기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순간 스위스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든다.
Welcome to the eagle country.
공항에 내리자마자 알바니아의 상징인 독수리의 나라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큰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공항에서 나와 소형 버스를 타고 숙소로 가는 길에는 노천 까페에서 하루종일 앉아있는 실업자들이 보이고, 길에는 훔쳤거나 마피아들의 소유 차량인 고급 외제차들을 보며, 순간 “내가 왜 여기 왔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약간의 당혹스러움과 실망감이 사라지는데는 2~3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알바니아의 티라나공항에 도착 직후, 독수리는 알바니아의 상징이라고 한다.

알바니아의 티라나공항에 도착 직후, 독수리는 알바니아의 상징이라고 한다.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의 평범한 마을 풍경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의 평범한 마을 풍경

동유럽 알바니아의 아픈 과거

알바니아는 수백년동안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고, 2차 대전이 끝난 후 공산정권이 시작되었던 곳이다.

1989년 공산권이 붕괴 되기 전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외교관계를 맺었던 나라는 쿠바와 북한이었다. 친구라고는 김일성과 피델 카스트로 밖에 없었던 악독한 독재자 엔버 혹사의 손에서 40년간 신음해온 알바니아는 1989년 이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경제를 받아들였지만 현재까지 20년이 지나도록 시장경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유럽 최악의 실업률로 거리에는 실업자들이 넘쳐나고, 수도 티라나의 도심에는 아직 공산주의의 잔유물이 굳건히 버티고 있었으며, 부정선거에 대항하는 시민 데모단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월드비전 사업장이 있는 리브라즈 지역. 겉으로는 아름답지만 교통시설의 인프라가 잘 조성되어있지 않아 열악한 모습

월드비전 사업장이 있는 리브라즈 지역. 겉으로는 아름답지만 교통시설의 인프라가 잘 조성되어있지 않아 열악한 모습

리브라즈 가는 길 만났던 초등학교 아이들

리브라즈 가는 길 만났던 초등학교 아이들

알바니아의 현실

알바니아는 70%가 산악지대로 기본적인 전기와 수도 말고는 사회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다. 수도 티라나의 일부 부촌과 상업지역을 제외하면 일자리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살인적인 실업률 때문에 대부분의 남자들은 외국에 나가 단순노동으로 돈을 벌어 가족들이 생계를 이어간다.

특히 지방 쪽에서는 아버지들이 외국에서 노동을 하고 있어 아버지와 함께 사는 가정보다 이산 가족들이 훨씬 많다.
이들은 화장실과 난방조차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는 3~4평 정도 되는 방 한칸에 6~7명의 가족들이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런 가정집들도 험준한 산악지대에 군데군데 지어져 있어 어린이들은 학교에 왕복 2~4시간을 걸어서 가는 일이 다반사 이다.

또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무려 40% 가 넘는 학생들이 학비가 없어 자퇴를 하고 있었다.

이 지역 사람들은 가구당 한화로 약 16~18만원 정도의 돈으로 한달을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월소득이 낮아 물가 또한 우리나라와 대비하여 훨씬 저렴할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현지 상점에서 몇 가지 물건들을 구입해보고 깜짝 놀랐다. 높은 인플레로 특히 공산품의 가격은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가난 때문에 알바니아는 유럽 인신매매의 주요 창구가 되어가고, 마피아 세력이 점점 커져간다며 면서 현지 직원은 울먹였다.
옆에 앉아있던 제임스 에반스 알바니아 월드비전 회장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처음에는 알바니아로 피난 온 코소보 내전 난민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알바니아에 사업장을 열었는데 난민들인 코소보 사람들보다 현지 알바니아 사람들이 훨씬 더 가난하고 힘들어 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결국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에 코소보-알바니아 통합 사무실을 열게 되었죠”.

리브라즈 지역의 방과 후 해맑은 아이들의 모습. 집까지 걸어서 두 시간 걸린다고 한다.

리브라즈 지역의 방과 후 해맑은 아이들의 모습. 집까지 걸어서 두 시간 걸린다고 한다.

트럭을 타고 떠나는데, 몇백미터나 쫓아왔던 아이, 교실이 보고싶다고 보여달라고 하니 몇년간 방치된 것 같은 창고같은 공간을 교실이라고 보여준다.

트럭을 타고 떠나는데, 몇백미터나 쫓아왔던 아이, 교실이 보고싶다고 보여달라고 하니 몇년간 방치된 것 같은 창고같은 공간을 교실이라고 보여준다.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희망의 꽃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알바니아 사람들은 희망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월드비전 알바니아에서 일하기 위해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다시 모국으로 돌아온 월드비전 현지직원 에리사가 나에게 이야기해준다.

“알바니아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정신이 맑고, 이웃을 소중히 여기는 긍정적인 사람들입니다.

알바니아의 고등교육 시스템의 수준은 동유럽에서 높은축에 속하고, 지금은 걸림돌이 되는 산악지역도 뛰어난 관광자원으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앞으로 유럽연합(EU)에 가입이 되면 질높은 노동력을 바탕으로 경제도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다고..”

한국이 오랫동안 도움을 받는 수혜국에서 90년대 월드비전의 후원국으로 바뀌었던 것처럼 알바니아도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알바니아 사업장의 직원들과 나는 과거 독재자 엔버 혹사가 소련이 침공할 것 이라는 망상 때문에 만들었지만, 지금은 무용지물로 방치되버린 수만개의 소형 벙커중 하나에 같이 걸터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산위에서 바라본 알바니아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제는 변화되어야할 낡고 위험한 집들도 보인다.

저 멀리에는 어린이 3~4명이 책가방을 매고 산 비탈길을 걸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약 40여분 동안 내가 그 벙커 위에 앉아서 다시 일어날 때 까지 그 아이들은 계속 산비탈을 올라가고 있었다.

‘아마 한시간쯤은 더 걸어야 집에 도착할 수 있겠지..’
이를 보며 다시한번 알바니아의 아이들과 월드비전 한국 후원자들의 징검다리로서 또한 그들이 변화를 이끌기 위한 조력자로서 사업을 담당하는 내 마음에 책임감이라는 선한 짐이 지워졌다.

#알바니아 리브라즈 사업장 자세히 보기

사업지역 리브라즈 지역개발사업장
(알바니아 동부)
(Librazhd ADP)
사업기간 2006. 10. 01 ~ 2021. 09. 30
총 수혜자 수 40,390 명

글/ 사진 월드비전 국제개발팀 허디모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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